ISSUE CASE · 02
이슈 판례 <2>
유령회사와 50만 원짜리 계좌
보이스피싱 사건은 피해자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판결문을 따라가면 그 뒤에는 회사 설립등기, 사업자등록증, 은행 창구, 체크카드와 OTP가 조용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류 위에서 태어난 회사
이 사건의 첫 장면은 어두운 골목도, 현금이 오가는 뒷방도 아닙니다. 법원 등기국입니다. 판결문에 따르면 피고인과 관련자들은 실체가 없는 유령회사를 설립해 그 법인 명의로 계좌를 만들고, 그 계좌에 연결된 접근매체를 보이스피싱 조직원이나 불법 도박사이트 운영자에게 유상으로 대여하기로 공모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모든 것이 종이 위에서 정상처럼 움직입니다. 법인등기설립신청서가 제출되고, 법인등기부에 회사가 생깁니다. 사업자등록증, 법인 인감증명서, 계좌개설 서류가 준비됩니다. 은행 창구에서는 ‘운영에 필요한 계좌’처럼 보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판결문이 보는 실체는 달랐습니다. 회사는 실제 사업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계좌를 만들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한 계좌당 매달 50만 원
판결문은 금액을 아주 구체적으로 적습니다. 피고인은 친구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유령회사를 설립하고 그 법인 명의 계좌를 개설한 뒤, 체크카드와 OTP카드를 넘겨주면 한 계좌당 한 달 사용료로 50만 원을 주기로 했습니다. 또 대포통장 양도조직의 구조에서는 한 계좌당 한 달 사용료 70만 원이라는 내용도 등장합니다.
이 숫자가 무서운 이유는 계좌가 ‘물건’처럼 가격표를 갖게 된다는 점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은행 계좌가 월급을 받고 공과금을 내는 생활의 통로이지만, 이 사건에서는 범죄자금이 지나가는 통로로 거래되었습니다. 계좌는 더 이상 이름 없는 숫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돈이 들어오고 빠져나가는 문이 됩니다.
은행 창구의 평범한 얼굴
은행 직원 입장에서는 서류가 중요합니다. 법인 명의 계좌를 개설할 때 법인이 정상인지, 계좌개설 신청인이 진짜 대표자인지, 제출된 문서가 맞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판결문도 이 부분을 짚습니다. 허위 법인이 밝혀지면 계좌 개설이 불허되거나 거래가 정지될 수 있고, 보이스피싱에 사용되면 은행도 책임 문제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피고인 측은 실제 회사처럼 행세하며 사업자등록증, 법인 인감증명서, 계좌개설 신청서류 등을 제출해 계좌를 만들었습니다. 판결문은 이를 업무방해로 보았습니다. 은행 창구의 평범한 절차가 범죄의 무대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겉으로는 도장과 서류, 계좌번호뿐이지만, 그 뒤에는 피해자를 향해 걸려갈 전화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부지원 대출을 받으려면...”
사건은 결국 피해자의 전화기로 이어집니다. 성명불상의 보이스피싱 조직원은 자신을 금융기관 직원처럼 소개하며 피해자에게 “정부지원 대출을 받으려면 사금융권 대출금을 상환해야 한다, 알려주는 계좌로 돈을 송금하면 대출을 해주겠다”는 취지로 거짓말했습니다. 판결문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여러 차례 돈을 보냈고, 5명의 피해자로부터 합계 9,365만 원이 편취되었습니다.
피해자는 돈을 보내는 순간 계좌 뒤의 유령회사를 보지 못합니다. 통화 속 목소리, 대출이라는 말, 상환해야 한다는 압박, 지금 처리해야 한다는 불안만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은 결국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계좌망으로 흘러갑니다. 회사 이름은 있었지만 회사는 없고, 계좌는 있었지만 정상 거래를 위한 문이 아니었습니다.
법원이 본 ‘알고도 넘긴’ 사정
피고인은 자신이 전달한 접근매체가 보이스피싱에 쓰일 것까지 알았는지가 쟁점이었습니다. 법원은 여러 사정을 종합해 고의를 인정했습니다. 피고인이 이미 전자금융거래법위반으로 형사재판 진행 중이었고, 접근매체가 불법 도박사이트에 사용됐다는 말이 나오도록 대비한 정황, 보이스피싱 범죄에 이용된 계좌에서 돈을 인출하게 하여 받은 정황, 입금명의자가 수시로 바뀌며 100만 원씩 입금되는 거래내역 등을 보았습니다.
판결문은 범죄를 한 장면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등기국, 은행, 카드와 OTP, 문자메시지, 계좌거래내역, 피해자의 송금 내역을 이어 붙입니다. 그렇게 보면 ‘나는 몰랐다’는 말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드러납니다. 보이스피싱 사건의 무서움은 전화 건 사람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돈을 받을 통로를 만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범행은 실제 피해로 이어집니다.
유령회사가 남긴 것
법원은 피고인이 대부분의 범행을 인정하고 일부 피해자에게 피해금을 지급한 점 등을 유리하게 보았지만, 적극적으로 허위 법인을 설립하고 계좌를 개설한 뒤 접근매체를 양도해 이익을 얻은 점, 그 접근매체가 실제 보이스피싱과 불법 도박사이트에 이용된 점, 여러 계좌와 장기간 범행 구조를 불리하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실형 선고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사건을 읽고 나면 보이스피싱이 더 입체적으로 보입니다. 피해자에게 걸려온 전화 뒤에는 조용한 서류 작업이 있고, 계좌 하나를 거래하는 계산이 있으며, 은행 창구를 통과한 카드와 OTP가 있습니다. 보이스피싱은 전화기 안에서만 벌어지는 범죄가 아닙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단 유령회사, 종이 위의 법인, 값이 매겨진 계좌가 함께 움직이는 범죄입니다.